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화권-위구르 관계 (문단 편집) === 서북공정 === > [[시진핑|시 주석]]은 "중국은 다민족 국가이며 다양성과 통일성은 우리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서도 [[유사역사학|"신장 민족 문화의 뿌리는 중국 문명에 있다"]]고 했다.[* 전혀 근거없는 이러한 유사역사학적 주장으로 과거 [[장제스]](...)가 위구르인들을 대상으로 했던 억지 주장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다양한 민족의 존재 자체는 인정하지만 중화 민족이라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소수민족이 '동화 대상'임을 못 박은 것이다. >---- >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090411480002843|#]] 중국 입장에서는 해당 지역이 전통적인 중국의 변방이라고 해당 지역의 중요성을 축소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고대 중국의 식문화와 기마술, 전투마차, 청동기 기술, 중세 초 중국 불교와 중국 음악 등등은 오늘날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신장]] 지역을 거쳐 중국으로 전파되었다는 것은 중국 입장에서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해당 지역은 중동의 청동기 문명 및 기마술이 유입되는 통로였기에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말(동물)|말]]과 [[양(동물)|양]] 같은 가축 외에도, 밀, 포도, 호두, 완두 같은 작물 역시 중앙아시아와 중동에서 해당 지역을 통해 중국으로 전파되었으며 중국 불교 중 [[교종]]은 쿠라마지바 등 중앙아시아 지역 불교 승려들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 당나라의 음악 당악은 서역 음악이 아니면 설명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될 당시 아직 중화문명의 중심지는 화북지방이었고 인도의 문물이 동서남북으로 교역이 활발했던 위구르 지역을 거쳐 오는 것이 당연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의 유교와 도교 같은 제자백가 사상들은 중앙아시아나 중동, 인도로 전파되지 못하였다. 종교 이외에도 역경 같은 중국 전통 역법이나 천문학 역시 제대로 전파되지 못했다. 외국인 입장에서 한문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중화사상|중화주의]]자들은 위구르가 [[유사역사학|마치 기원전 2000년경부터 꾸준히 중국의 영역이었던 것처럼 주장]]하지만[* 해당 주장은 원래 중국 사서에 있는 주장도 아니고 중국 공산당이 했던 주장이 아니라 국공내전 시기 장제스가 [[서왕모]] 관련 신화를 바탕으로 했던 주장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에는 국내 친중공 성향의 사람들 중에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이런 주장을 그대로 따라하는 사람들이 있다.] 위구르에 한족이 직간접적으로 지배권을 행사한 경우는 [[기원전 108년]]경 [[전한]], [[후한]][* 그나마도 후한은 대부분의 기간을 위구르의 동남부 극히 일부 지역만을 양주(凉州)의 일부로 지배한것 뿐이었다. 고고학적 연구 결과를 대조한 결과 위구르 지역 대부분은 당시 아프가니스탄을 중심으로 한 쿠샨 왕조의 영향력이 더 강했다.], [[수나라]] 중후기부터 [[당나라]] 초기, 그리고 [[청나라]] 말기에 한정되며 청나라 통치도 야쿱 벡 반란 이전에는 엄연히 [[만주족]]의 통치로 한족의 신장 지역 유입은 최대한 제한되었다. [[오호십육국]] 시대에도 북방 왕조들이 동튀르키스탄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긴 했지만 해당 지역의 행정에는 제대로 된 한문이 사용되지 못하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위구르인들이 중국어의 방언을 사용하였다는 식의 이런 중화주의자들의 주장은 남아공의 [[줄루족]]이 자신들이 영국하고 관련이 있으니까 인도를 자신들의 식민지였다고 주장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수준이다. 전근대에 한족 군인들이 직접 해당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한 경우는 전한, 후한, 그리고 당나라 때의 고선지의 군사 작전[* 당나라 치세 초반의 서역원정군은 대부분 돌궐 동맹군에 의해 이루어졌었다.]에 의한 것인데 비교하자면 1) 한나라 군대가 타림 분지를 침략했던 시기에는 [[고조선]] 역시 [[전한]]의 한무제의 공격을 받아[* 한나라는 타림 분지 일대를 흉노의 오른팔, 고조선을 흉노의 왼팔로 취급하였다.] 멸망하고 [[한사군]]이 세워졌으며, 2) 당나라가 [[안서도호부]]를 세웠던 시기 [[안동도호부]]를 세웠다가 신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발해가 건국되는 과정에서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서 철수하였던 바 있다. 고대 중화 왕조들은 타림 분지의 오아시스 도시들과 만주 일대의 한민족들의 국가를 모두 북방 유목제국의 동맹으로 파악하였고, 북방 유목제국의 공세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타림 분지와 한반도를 동시에 공격하곤 했다. '''다시 말해서 신장(동투르키스탄)이 꾸준히 중국의 영역이었다는 주장은 [[시진핑]]이 주장한 "한반도는 중국의 일부"라는 망언과 일맥상통하는 패권주의적 주장'''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 He then went into the history of China and Korea. Not North Korea, Korea. And you know, you’re talking about thousands of years …and many wars. '''And Korea actually used to be a part of China.''' And after listening for 10 minutes I realized that not — it’s not so easy. You know I felt pretty strongly that they have — that they had a tremendous power over China. I actually do think they do have an economic power, and they have certainly a border power to an extent, but they also — a lot of goods come in. But it’s not what you would think. It’s not what you would think. > > 이후 시진핑 주석은 한국과 중국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북한이 아닌 한국에 대해서 말이죠. 아시다시피 수천 년 동안의 (역사와) ... 전란에 대해서 우린 이야기했습니다. '''한국은 사실상 중국의 일부였다'''는 것도요. 그리고 한 10분 정도 이야기를 들어보았는데 그리 쉬운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알다시피 나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 대륙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솔직히 나는 중국이 (강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으며, 또 확실히 광활한 대륙 전반에 걸쳐 국경을[* 정황상 '무역 장벽'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중국은 많은 것을 수입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자분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다른 것이죠. >---- >[[https://blogs.wsj.com/washwire/2017/04/12/wsj-trump-interview-excerpts-china-north-korea-ex-im-bank-obamacare-bannon/?utm_content=buffer2c69d&utm_medium=social&utm_source=twitter.com&utm_campaign=buffer|WSJ의 트럼프 대통령 인터뷰]] 한반도와 베트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동튀르키스탄과 중국과의 관계도 일방적인 종속 관계로 단순화할 수 없다. 일례로 거란족들이 중앙아시아에 건국한 [[서요|카라 키타이]]의 경우 서방의 나라들의 교류를 할 때 중국 영토에 있는 것도 아니고 한족 신민들이 별로 없었음에도 불구 자신들을 적극 "중국의 황제"라고 과장 광고를 하면서 권위를 내세우던 편이었다. 고려 시대 [[외왕내제]]를 시행하며 [[탐라국]]을 번국처럼 삼거나 베트남에서 외왕내제를 하며 이웃 민족들에게 권위를 내세운 것과 같은 맥락이다. 거란족 난민들이 세운 카라 키타이의 왕족들은 중앙아시아 서쪽의 이웃 국가들에게 자신들이 마치 중국 전체의 지배자라도 되는 것처럼 과장하기를 좋아했다. 카라 키타이를 건국한 야율대석이 데려온 사람들 중 중국인은 드물었으나[* 야율대석이 중국에서 가돈으로 피신할 당시 그를 따라온 인원은 80~200여 명 정도였다. 이 중 한족이 얼마나 되었을지는 미지수이다.] 중국어는 주로 외교적 위신을 위해 상징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실질적으로 행정을 비롯해 일상 생활에 사용된 언어는 튀르크계, 페르시아계 현지어였다. 한반도와 베트남 역시 행정이나 외교에서는 한문이 사용되었으나, 일상 문화에서는 중국어와 별개의 현지어가 사용되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결론적으로 동투르키스탄 지역의 경우 중국으로부터 유교, 불교를 받아들이기보다는[* 오히려 불교는 상술된 것처럼 오늘날의 동투르키스탄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중국으로 유입된 종교이기도 하다.] 상술한대로 오히려 중국에 서역의 문물을 전파하는 역할을 맡았다. 중국의 물산을 가지고 다른 지역과 교역함과 동시에 타 지역 문물을 중국으로 수출하는데 적극적이었던 지역이다.[* 대표적인 예로 호탄은 중국의 뽕나무와 누에, 비단 제조술을 중동으로 전파하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인도산 면을 중국으로 전파하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였다. 호탄과 근접했던 [[고창회골]]이 중국으로 주로 수출하는 품목 중 하나가 자국에서 생산된 목면이었다.] 오늘날 중국에서 동튀르키스탄 지역 역사를 전부 중국사에 욱여넣으려는 이유는 소수민족 동화 정책 이외에도 이런 부분을 간과할 수 없다. 과거 [[중원]]을 중심으로 한 유교적 가치관과 다르게 오늘날 중화 패권주의 입장에서는 중국, 중국인들이 항상 해외로 진출하고 적극적으로 교류한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